너에게서 나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서 ―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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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리 댓글 2건 작성일 16-01-29 14:07본문
?한강의 소설은 이번으로 어느덧 세번째다. 시간을 역행하듯 <소년이 온다>, <노랑무늬영원>, 그리고 <바람이 분다, 가라> 순으로 읽었다. 이 소설은 <노랑무늬영원>에 실린 단편 <파란 돌>과 연계된다.
?한 편의 독립영화 같은 소설이었다. 한강의 소설들은 모두 영화 스케치 같은 느낌인데, 깔끔하게 다듬어진 최근작들에 비해 확실히 이 소설은 더 산발적이고 거칠다. 어쩌면 그래서 이때에 이 소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그런 싸한 분위기가 어울린다.
?<소년이 온다>와는?공통점이?있다. 과거의 진원지에서 일어난 파동이 현재나 미래를 어떻게 엄습하는가, 그것이 어떤 잔해를 남기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등장한다.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열기는 죽음이며 가장 시린 냉기는 사랑이다. 이 소설의 '잔해'는 바로 그것이다. 사랑,?차갑고 고요한 것.
?죽은 서인주를 중심으로, 그녀를 어떤 신화로 만들고자 그녀의 죽음을 자살이라 말하는 강석원이 있고, 그녀가 결코 자살할 사람이 아니며 죽었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 말하는 이정희가 있다.?정희는 강석원과의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강석원의 '서인주 평전'에 반박하기 위한 인주의 조각들을 찾아나선다.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좀체 맞춰지지 않던 인주의 조각은 강석원뿐 아니라 정희 역시 처절한 광기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광기가 예리하게 서로를 겨누고, 인주의 작업실은 강석원에 의해 불타고 만다. 정희 역시 죽음의 문턱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러나 바로 그 죽음이 정희에게 새로운 승리―파란 돌을 쥐어주었다. 삼촌이 말했듯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서는 살아야 했다.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344p)」 또한 인주가 말했듯, 아주 오래 살아야 했다.?「넌 아마 아주 오래 살 거야.// 모든 걸 기억하면서.// 지금보다 더 추위를 타면서. (327p)」
?강석원이 불태운 인주의 흔적들은 마치?인주 본인인 것처럼 정희에게 불을 옮겨 붙인다. 그것이 그녀를 뜨겁게 되살릴 것임을 암시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에는 정희의 식사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그것은 정희 본인을 위한 밥이 아닌?인주로 인한, 애도로써의 밥이다.?삶과 사랑은 먹음이라는 행위로 꾸준히 이어지기 마련이다. 애도의 식사는 언젠가 그쳐야 하고, 우리는 슬픔의 화염 속에서 몸을 일으켜야 한다. 인주는 정희에게 한사코 자기 먹을 것을 내어주려 했다. 정희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음식도 마치 자신이 차린 듯 정희에게 도로 들이밀었고, 괜찮다는 말을 밥 먹이듯이 먹이곤 했다.?「괜찮아, 라고 인주는 나에게 말했다./ 링거 바늘이 꽂힌 오른손으로 내가 처음 숟가락을 쥐었을 때였다. (……) 먹어도 괜찮아.// 맛이 있어도 괜찮아.// 윤이 흐르는 밥 한 공기를 비울 때까지 그 목소리를 듣는다. (176p)」?이처럼 인주는 정희를 위해 수없이 많은 것을 선택해왔을 것이다. 그 선택이,?정희를 살려내고도 자신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고 해도.
?선택은 우주와 별에 대한 이야기에서도?이어진다. 인주는 죽기 전, 화가로서의 말기에 죽은 삼촌이 그렸던 것과 똑같이?별의 폭발을 그렸다. 「늙은 별이 터지며 나온 충격파가 주위에 있던 성간구름을 수축시킨다. (……) 이 수축된 성간구름이 별이 되기 위해서는 구름의 질양이 일정한 값보다 커야 한다. 이것이 중력수축에 필요한 '진스의 임계질량'이다. 구름의 질량이 임계질량을 넘어서는 순간 별의 일생이 시작된다. (18p)」 삼촌과 인주―별들의 죽음은 마침내 정희―새 별의 일생을 일으킨 것이다.
?마지막장의 제목이자 소설의 제목인 '바람이 분다, 가라'는 삼촌과 인주가 정희에게 남겨준 말이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 밝힐 때?비로소 달의 뒷면에 다다를 수 있다. 인주의 메모, 강석원의 비통, 흩어져 있던?모든 조각들을 통해 서로가?서로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지키고 싶어했는지, 그 방식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앎으로써.
?정희는?앞서 '너는 이제 차가움이지. 죽음이지.'(177p)라는 독백으로, 죽음을 냉각의 이미지로 여겼다. 이는?강석원이?인주의 미술관을 '달의 뒷면'에 짓겠다는 글을 쓴 것과 유사한 오해다. 그러나 정희는 인주를, 인주는 정희를 간절하게 사랑했다.?사랑의 방향을 이해하지 못한 강석원에게 '달의 뒷면'에 다가가기란?불가능했다.?
?정희는 다시금 독백한다.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하지만, 어쩌면 너도 나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까./ 내가 너를 몰랐던 것보다 더.(335p)」?그렇다. 사랑은 서로를 모른다는 것을 진실로 아는 것이다.
?한강이 이 소설에서 말한 것은 죽음으로 부서진 사랑이며 사랑으로 부숴낸 죽음이었다. 사랑과 죽음을 엮어낸?많은 고전들이 비극과 함께 남겨주었듯?사랑과 죽음이 낳은 새 별의 이름은 삶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 고 인주가 부드럽게 등을 떠밀었다. 정희가 다시 처음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다. 봄이 왔어.
?노란 위액을 끝없이 토해냈다. 차라리 죽어서 끝내고 싶은 통증이었다. 눈두덩을 후벼 파는 안두통, 펴지지 않는 허리, 헝클어진 머리로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었다. 처음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 때문에 허리를 접고 걸었다. 보도블록들 틈으로 파릇한 싹이 돋은 것을, 가로수 밑동에 물이 오른 것을, 사람들이 봄옷 차림으로 걸어가는 것을 흔들리는 시야로 봤다. 미친 여자처럼 겨울 외투를 껴입은 채 그 눈부신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봄이 왔어.
?너를 잃은 뒤 처음으로 입술을 열고 새어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 (384p)
?쓰는 동안 푸른새벽의 <사랑>을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사랑, 흔한 이야기다.
우리
살아보자고 넌 그랬었지요 그 말 따라 또 모랫자국 따라 또 바다를 걸었어요
발밑을 쓸어가는 죽다 만 기억 틈에 네 일도 아마 있나 그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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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nn님의 댓글
lynn 작성일잘 읽고 갑니다 ^^
우리님의 댓글
우리 작성일감사합니다!